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필리프 1세 (문단 편집) === 치세에 대한 평가 === 오를레앙 가문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대한 호감은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오를레앙)]]부터 있었던 것이라 전해진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이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호감을 느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얼마나 그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오를레앙 공작가는 [[앙시앵 레짐]]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대귀족이면서도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기묘한 전략을 유지했다. 아무튼 정통 부르봉 왕가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전략적인 입장도 있었던 듯. 조상의 생각처럼 앙시앵 레짐 문제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에 대한 루이필리프의 대안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프랑스에 이식하자는 것이었다. 이 '오를레앙 공에 의한 입헌군주정'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 시기 하나의 대안으로서 언제나 존재했다. 특히 복고 왕정 시대부터 오를레앙 가문 지지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자였다. 사실 부르봉 복고 왕정의 첫 국왕인 [[루이 18세]]의 경우 입헌파를 밀어주고 왕당파를 내각에서 배제하는 등 꽤 중도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하원은 소선거구제였기에 당연히 왕당파로 도배되었으나, 상원은 왕이 임명하는 세습직임에도 불구하고 옛 귀족보다는 나폴레옹의 옛 관료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즉 루이 18세는 의도적으로 중도를 걸었던 것이다. 심지어 열받은 왕당파 쪽에서 왕은 의회 다수파에게 내각 구성을 위임해야 한다며 의회주권론을 주장하고, 이에 당황한 입헌파는 왕은 헌장에 위배되지 않는 한 마음대로 내각을 구성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다음 왕인 [[샤를 10세]]는 구체제에 가까운 면모를 보였기에 여러모로 자유주의와 맞지 않았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나파르트주의]]는 "민주주의를 내거는 [[권위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물론 [[백일천하]] 시기 나폴레옹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인 '자유 제정' 때문에 보나파르트주의도 어느 정도 인기는 있었다.] 그러므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의 생각은 오를레앙 공이 이상적인 정부를 만들어, 질서를 지키는 한편 관용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중도적인 대안이었다.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으나 그 반면에 전면적인 [[민주주의]]의 도입은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법통주의|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골수 [[왕당파]]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부르봉 왕조에 대한 지지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공화정 정부는 민주주의를 내걸면서도 왕당파의 폭발을 막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억제하는 모순을 지속적으로 안고 있었다. 또한 소위 '프랑스의 영광'을 건설한 나폴레옹 신화에 기초한 나폴레옹 지지자, [[보나파르트주의]] 역시 굉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 체계에서는 막기 어려웠다. 실제로 후일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운 [[나폴레옹 3세]]는 70%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론적으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법정 인구(pays legal)' 25만명(실제 유권자는 17만명 정도)을 유권자로 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국정에 적용했다. 이들은 중산층의 대표자인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구에서 빠진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가 특권 계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의 왕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오를레앙주의]]자들과 루이필리프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기의 여러 이념들 가운데서 나름대로 '[[중도주의]]'의 위치에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복고주의보다는 한 발자국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개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왕이기는 했지만, 루이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골수 왕당파에게는 찬탈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외국의 왕족과 귀족들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보여져 '폭동왕'이라고 폄하당했다. 특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후손으로 프랑스의 최고 적통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루이필리프를 매우 증오해서 망명 시절에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게다가 입헌왕정을 지지한 중도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완전한 공화정을 추구하는 진성 공화파, [[프랑스 제1제국]]을 지지한 보나파르트파는 각기 자기네 꿍꿍이대로 왕정을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